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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9-26 14:08 조회1,32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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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주명철의 프랑스 역사산책
(18) 샹티이성

푸케 이어 콩데 공 모신 바텔
집사장 거쳐 총지배인으로 활약

루이 14세 초청 샹티이성 잔치 중
주문한 생선 제때 배달 안 되자
주군 앞날 걱정해 극단적 선택

도시 인구 10%였던 집사와 하인
귀족 수행하느라 결혼도 못해

17세기의 유명한 집사장 바텔의 비극이 도사린 샹티이성의 모습. 파리 근교에 있는 샹티이성은 1560년께에 세워졌다. 위키피디아파워사다리


2000년 칸 영화제의 개막작은 롤랑 조페 감독의 <바텔>(Vatel)이었다. 파리의 북역에서 기차로 40분이면 닿는 샹티이성에서 일어난 일을 다룬 영화다. 프랑수아 바텔은 거물급 인사인 니콜라 푸케와 콩데 공을 차례로 모신 인물이다.

영화는 1671년 4월23일 목요일 오후부터 25일 토요일까지 콩데 공이 샹티이성으로 초대한 루이 14세와 일행 2천명을 위해 바텔이 침식·연회·볼거리·조명을 세심하게 준비하는 모습과 마지막 날 아침에 일어난 비극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연회에 참석했던 마담 드 세비녜가 딸 프랑수아즈(그리냥 백작부인)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바텔의 최후를 알 수 있다.

“4월25일 4시부터 바텔은 홀로 성안을 돌아다니다가 생선장수를 만났다. 그가 생선 몇마리를 보고 전부냐고 묻자, 생선장수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낙심한 그는 자기 방으로 올라가 칼끝을 가슴에 대고 문으로 달려갔고, 그렇게 세번 만에 숨졌다. 얼마 뒤, 그가 주문했던 생선이 잇달아 도착했다. 그 소식을 전하러 간 하인들이 방문을 부수고 들어가니 바텔은 피를 흥건히 흘리고 죽어 있었다.”


샹티이성의 비극 등 봉건시대 프랑스 상류사회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긴 마담 드 세비녜의 초상화. 17세기 화가 클로드 르페브르의 작품. 위키피디아


1560년께에 샹티이성 완성

마담 드 세비녜는 17세기의 상류층 생활을 자세히 알려주는 서한집을 남겼다. 그는 외할아버지 필리프 1세가 1607년에 지은 파리 보주광장 1번지의 오텔 쿨랑주(Hôtel Coulanges)에서 1626년에 마리 드 라뷔탱샹탈로 태어났다. 그는 1644년에 앙리 드 세비녜와 결혼한 뒤 프랑부르주아 길 38번지의 오텔 드 쿨랑주(Hôtel de Coulanges)에서 세비녜 후작부인으로 살았다. 리옹의 부시장을 거쳐 프랑스 재무관이 된 스카롱이 짓고 1640년에 쿨랑주 가문에 넘어간 저택이다.

그가 살던 프랑부르주아 길에는 카르나발레 박물관 등 유서 깊은 건물이 있고, 비에유뒤탕플 길에 정문을 둔 바르베트 저택의 뒷문 쪽 골목과 연결된다. 바르베트 저택은 1300년에 파리 상인대표(시장)인 에티엔 바르베트가 지었으며, 왕실이 사들여 증개축했다. 뒷문 쪽 골목은 쇠뇌 사수의 골목(Ex-allée des Arbalétriers)이라는 이름으로 필리프 2세 오귀스트 성벽까지 연결되었다. 원래 궁수들이 쇠뇌 과녁을 놓고 사격 연습을 하던 공터였다가 골목으로 축소되었다.

1407년 11월에 ‘미친 왕’ 샤를 6세의 비 이자보 드 바비에르가 바르베트 저택에서 열두째 아기를 사산했다. 그날 오를레앙 공 루이 1세는 사촌 형수인 왕비를 보러 갔다가, 곧바로 생폴 저택으로 오라는 왕의 명령을 받았다. 그는 수행원 두세명만 데리고 저택의 뒷문을 나와 골목길에서 부르고뉴 공 장 상 푀르의 부하들에게 팔과 손이 잘리고 머리가 깨져 뇌수를 사방에 뿌리면서 처참하게 목숨을 잃었다.

이제 샹티이성으로 가보자. 1560년께에 최고 무관귀족인 안 드 몽모랑시 공작은 영지인 샹티이에 있던 집을 헐고 성을 지었다. 1632년에 앙리 2세 몽모랑시 공작이 사망한 뒤 부인의 조카인 앙기앵 공작이 호화로운 샹티이성을 물려받았다.


공중에서 본 샹티이성. 위키피디아



샹티이성의 도서관 모습. 위키피디아


16살부터 군을 지휘하던 앙기앵 공작은 거물급 왕족이었고, 루이 13세의 총리대신 리슐리외 추기경의 조카사위였으며, 1646년 12월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콩데 공이 된다. 콩데 공은 ‘위대한 콩데’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뛰어난 장수였다. 계몽사상가 볼테르는 그를 ‘타고난 군인’이라고 평했다. 정식 이름이 루이 2세 부르봉콩데인 그는 17세기 전반기 유럽을 갈가리 찢은 30년 전쟁(1618~1648) 시기에 두각을 나타냈다.

관직도 세습한 문관귀족들

리슐리외 추기경은 반항하는 개신교도들의 도시를 직접 군사적으로 진압한 정치가로서, 루이 13세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애썼다. 그는 프랑스를 국내외로 안전하게 만드는 일을 ‘국시’(國是, Raison d’Etat)로 삼았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가톨릭 국가인 에스파냐와 개신교 국가들이 1618년에 시작한 국제전쟁이 점점 에스파냐에 유리해지자, 리슐리외는 에스파냐 합스부르크 가문을 중심으로 국제질서가 부활하면 프랑스가 안전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635년 5월 개신교 국가들 편에서 개입했다.

1642년 12월 리슐리외 추기경이 사망했다. 그 틈을 타서 에스파냐는 프랑스를 공격했다. 1643년 5월 루이 13세도 세상을 떴다. 5살짜리 루이 14세가 왕위를 잇고 모후 안 도트리슈가 섭정이 되어 전쟁에 휩쓸린 나라를 이끌어야 했다. 에스파냐의 벨기에 지방 총독인 멜루는 보병 1만7천명, 기병 8천명의 막강한 플랑드르군으로 아르덴 지방의 로크루아(파리 동북쪽 240㎞) 요새를 공격했다.

1643년 5월 (아직은 콩데 공이 아닌) 22살의 앙기앵 공작은 보병 1만5천명, 기병 6천명으로 열세인 피카르디군에 루이 13세가 닷새 전에 사망했다는 사실을 숨긴 채 용기를 북돋워 로크루아 전투에서 이겼다. 앙기앵 공작은 그 뒤에도 승승장구하면서 16세기의 종교전쟁으로 피폐해진 프랑스에 30년 전쟁의 향방을 결정하는 지위와 국제적 명성을 되찾는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실제로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바뀐 유럽의 지도를 보면 프랑스·네덜란드·스위스가 이득을, 에스파냐와 신성로마제국이 손해를 보았음을 알 수 있다.

유럽 열강이 국제질서를 재편하는 사이, 국내 기득권 세력이 왕권 강화에 제동을 걸었다. 프랑스 왕국의 귀족은 원래 “싸우는 사람들”인 무관귀족뿐이었으나, 왕국이 통일되고 발달하면서 법관들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대다수 부르주아 계층인 법률가가 주요 관직(office)을 사들여 세습하면서 문관귀족이 되었다. 더욱이 1604년부터 ‘상속세’(paulette)를 내고 관직을 정식으로 물려주었다. 관직은 재산이었기 때문에 왕이 함부로 파면할 수 없었다. 가장 유력한 문관귀족인 파리고등법원의 법관들은 왕령의 효력을 발생시키는 등기권을 가졌고, 더욱이 왕령이 부당하다는 이유를 상주하는 권한(상주권)을 행사해서 왕권을 제한했다.

이것이 프롱드의 난의 배경이다. ‘프롱드’란 원심력을 이용해서 돌을 던지는 투석기나 새총을 뜻한다. 리슐리외 추기경의 뒤를 이어 왕권을 강화하려고 애쓰는 마자랭 추기경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사무실 유리창에 돌을 던졌기 때문에 ‘프롱드의 난’이라 한다. 더욱이 문관귀족들은 일부러 유치한 언어를 사용해서 마자랭을 놀리는 글인 ‘마자리나드’(mazarinades)를 마구 뿌리면서 자신들의 특권을 지켜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혁명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뜻을 이룬 상황에서 무기를 거두고 사면받았다.

그러나 거물급 귀족들은 이탈리아 출신(마자랭)이 왕권을 강화한답시고 국정을 좌우하는 일을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에 평민들과 힘을 합쳐 프롱드의 난을 이어나갔다. 콩데 공은 처음에는 마자랭 편을 들다가 나중에 왕족의 편에 가담했다. 마자랭은 1650년 1월 그를 체포하여 뱅센성에 가두었다. 루이 13세의 동생인 가스통 도를레앙이 왕족의 지도자로 나서서 저항했다. 콩데 공은 13개월 만에 석방된 뒤 보르도로 가서 에스파냐와 협상하고 군대를 지원받아 파리로 진격했다. 왕은 1651년 9월 성년이 되었지만, 모후와 마자랭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샹티이성의 주인이었던 콩데 공의 초상화. 쥐스트 데그몽의 작품. 위키피디아


1653년 2월 마자랭이 파리에 입성하면서 난을 진압하고, 가스통 도를레앙을 블루아성으로 귀양 보냈다. 콩데 공은 프랑스와 에스파냐가 1659년 11월 영토 문제와 루이 14세의 결혼 문제를 담은 피레네 조약을 맺은 덕에 비로소 프랑스 품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콩데 공은 1671년 봄에 샹티이성에 루이 14세가 방문할 때까지 완전히 사면을 받지 못했다.

샹티이성은 1671년 4월23일 목요일 오후부터 이튿날 밤까지 화려한 잔치로 떠들썩했다. 보르비콩트에서 본 잔치 이래 1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마담 드 세비녜의 편지를 보면 왕도 처음에는 25일 토요일에 방문할 계획이었다. 왕이 하루만 방문해도 최소 네끼를 차리고, 끊임없이 주전부리를 내놓고, 수많은 조명과 불꽃과 연극을 준비해야 할 텐데, 행사를 준비하는 바텔은 방문 일정과 손님의 수를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애태웠다.

루이 14세의 갑작스러운 숙박 때문

1665년부터 샹티이성의 집사장(maître d’hôtel)이었다가 1667년부터 총지배인(contrôleur général)이 된 바텔은 왕이 2천명 이상을 데리고 2박3일을 머무른다는 사실을 보름 전에야 알았다. 그는 인근 농장과 먼 항구까지 사람들을 보내 식료품 재료를 구하고, 요리사와 하인과 허드렛일꾼을 새로 구했다. 그는 다양한 식단을 짜면서 요리사들과 빵·고기·생선·포도주·과일의 양을 계산했다. 시설이 부족했으므로, 이웃 마을에도 숙소와 마구간을 마련했다. 콩데 공이 모든 비용을 책임질 일이었지만, 왕의 신임을 받고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우면 곧 빚을 갚을 수 있을 터였다.


18세기 샹티이성의 모습. 장바티스트 랄르망의 작품으로 콩데박물관 소장. 위키피디아


그런데 생선 위주의 밥상을 준비하는 날 새벽이 왔음에도 싱싱한 생선이 겨우 몇마리만 도착했으니 지난 2주 동안 콩데 공을 위해 제 몸을 돌보지 않고 준비한 바텔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으리라. 그는 콩데 공의 완전한 사면과 신임을 되찾는 일을 그르쳤다는 자책감에 자살로 속죄했다.

도시 인구의 10%나 되는 집사·하인은 언제나 귀족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미혼자였다. 바텔도 미혼이었고 파리에서는 콩데 저택에서 지냈다. 6구의 콩데 길 9~15번지에 1764년까지 있었던 저택의 정원은 파리에서 제일 긴 보지라르 길과 닿는 곳까지였고, 왕족의 특권을 누리는 철책으로 경계를 표시했다. 또한 그는 굶주린 늑대가 나타나던 오솔길(sentier)을 뜻하는 상티에 길과 몽마르트르 길을 이어주는 생조제프 길(2구)에 아파트를 얻어서 개인 시간을 누리기도 했다.

문득 샹티이성의 실내에서 본 초상화들과 서재의 진귀본들, 그리고 눈 덮인 정원 끝에서 시냇물과 함께 얼어버린 물레방아가 생각난다. 화려한 연회를 묘사할 길이 없어 그저 영화 <바텔>을 권할 뿐이다.



▶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바스티유의 금서>와 <파리의 치마 밑> 등 프랑스 사회 및 문화사에 관한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한국 역사가의 눈으로 해석한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을 지난해 완간했다. 현대 민주주의를 개척해온 프랑스사를 장소와 인물 중심으로 풀어보려고 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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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도 주목한 김정은의 이례적인 공개사과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유시민 이사장(왼쪽)과 자유한국당 홍준표 전 대표가 3일 오후 ‘유시민의 알릴레오’와 ‘TV홍카콜라’를 조합한 ‘홍카레오’ 토론배틀을 마치고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한 스튜디오에서 나오며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19.6.3 연합뉴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남한 민간인 사살과 관련해 이례적으로 공개사과 메시지를 내놓았다. 김정은 위원장의 사과는 국제사회의 비난 여론이 고조되는 상황을 의식한 조처로 보인다. 세계 주요 언론은 김정은 위원장의 사과를 긴급하고 상세하게 보도했다.

북한 통일전선부는 25일 청와대에 보낸 통지문에서 “김정은 동지는 가뜩이나 악성바이러스 병마 위협으로 신고하고 있는 남녘 동포들에게 도움은 커녕, 우리 측 수역에서 뜻밖의 불미스런 일이 발생해 문재인 대통령과 남녘 동포들에게 커다란 실망감 더해준 것에 대해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뜻 전하라고 했다”고 밝혔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이날 노무현재단 유튜브로 생중계된 ‘10·4 남북정상선언 13주년 기념 토론회’에서 김 위원장이 사과했다는 속보가 전해지자 “우리가 바라던 것이 일정 부분 진전됐다는 점에서 희소식”이라고 평가했다. 김 위원장이 이례적으로 북측의 잘못에 대한 사과를 함으로써 합리적이며 개혁적인 정치를 추구하는 계몽군주의 면모를 보여줬다고 표현했다.

유 이사장은 “김 위원장의 리더십 스타일이 이전과는 다르다. 이 사람이 정말 계몽군주이고, 어떤 변화의 철학과 비전을 가진 사람이 맞는데 입지가 갖는 어려움 때문에 템포 조절을 하는 거냐, 아니냐(하는 질문을 받는데), 제 느낌엔 계몽군주 같다”고 말했다.

정세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도 김 위원장에 대해 “일종의 계몽군주로서의 면모가 있다”고 동의하며 “‘통 큰’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유 이사장은 북측이 보내온 통지문 내용 중 우리 국방부가 ‘만행’이라 한 것에 유감을 표한 것은 “적반하장”이라고 비판했다. 정 수석부의장은 “불행한 사건에 통지문으로 충분하다고 볼 수는 없다”고 평하기도 했다.

홍준표 의원은 26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사과 메시지를 보낸데 대한 여권의 반응에 대해서도 “통일부 장관은 두번 사과에 감읍(感泣)했고 유시민 전 장관은 계몽군수 같다고 김정은을 칭송했다”며 불편함을 드러냈다.

그는 “이번 우리 국민 피살, 화형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보인 문 정권의 처사는 박지원 국정원장 만이 유일한 대북 통로가 있다는 것만 확인됐다”며 “국회 긴급 현안질의로 사태의 진상을 밝히고 대북정책을 전환해야 할 때다. 국회 일정을 걸고서라도 긴급 현안 질의는 꼭 관철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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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박세정 기자] "멈추지 않는다. 고로 존재한다. 베가”

애플 아이폰과 치열히 경쟁하다 사라진 팬택 ‘베가’. 젊은층에겐 생소한 브랜드이지만 한때는 삼성전자에 이은 LG전자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던 스마트폰 국내 3강이였다.

“우리는 단 한번도 정상에 오른적이 없다. 그럼에도 질주를 멈출수 없는 건, 오직 휴대폰 하나만 바라본 우리의 열정이 반드시 승리할 것을 믿기 때문이다. 멈추지 않는다. 고로 존재한다. 베가”(이병헌의 내래이션 광고)

팬택은 한때 국내 벤처 신화였다. 아이폰의 등장과 함께 큰 위기에 봉착한 팬택. 오랜 기간 워크아웃, 법정관리 등 혹독한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지만, 결국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자본력에서 큰 열세인 팬택이 글로벌 기업이였던 노키아·모토로라까지 몰락시킨 애플 아이폰과의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 했다.

역사속으로 사라진 팬택의 스마트폰 베가가 아직 살아 있다. 중고폰 시장에서 꾸준한 '러브콜'을 받고 있다. 국내 통신시장의 '아픈 손가락'이었던 팬택 베가. 레트로(복고) 열풍에 맞춰 마니아층의 수요가 이어지고 있다.

부담없는 가격으로 '세컨드'폰으로 팬택 베가를 찾는 소비자도 끊이지 않으면서, 팬택이 중고 시장에서 마지막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 4년전 제품 …월 평균 800대 이상 판매


중고폰 거래 플랫폼 업체 유피엠(UPM)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지난 8월까지 중고 시장에서 거래된 팬택 제품은 7141대다. 월평균 892대가 꾸준히 판매됐다.

월평균 판매 대수가 삼성(23만3741대), 애플(11만5678대), LG(4만252대)와 비교하면 크지 않지만 사라진 기업의 제품이 중고 시장에서 지속적으로 거래되는 것은 이례적이다.

특히 트렌드가 빠르게 변화하는 스마트폰 시장에서 4년전 출시된 제품의 수요가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점도 특징이다. 팬택 판매량은 중저가 신규 제품이 지속적으로 출시되고 있는 화웨이(1011대)의 월평균 판매량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다.


2016년 6월 팬택에서 마지막으로 출시된 스마트폰 아엠백(IM-100)


▶ '레트로' 열풍에 소장용으로 '구매'…가격도 5000원대


팬택의 꾸준한 판매는 무엇보다 '레트로' 열풍으로 과거 팬택을 추억하는 '마니아층'의 수요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베가', '스카이' 등 팬택을 대표하는 제품에 대한 향수로 2세대(2G), 3G폰을 찾는 소비자들도 적지 않다.

부담없는 가격으로 메인 스마트폰 외에 '세컨드폰'으로 팬택을 선택하는 고객도 있다. 팬택의 평균 중고 판매가격은 5594원으로 1만원이 채 되지 않는다. 삼성(10만9631원), 애플(22만7676원)의 10분의1에도 미치는 않는 가격이다.

유피엠 관계자는 "여전히 팬택을 좋아하거나 세컨드폰으로 이용하려는 수요가 있다. 팬택 베가는 아직도 꾸준히 고객들이 찾는 제품"이라고 설명했다.


2013년 출시된 팬택 베가시크릿업


팬택은 통신시장에선 '아픈 손가락'으로 기억된다. 2010년 초만에도 국내 시장에서 LG전자를 제치고 업계 2위를 차지했다. 세계 시장 7위까지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급변하는 스마트폰 시장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서 경영난으로 '퇴장'수순을 밟았다.

2015년 쏠리드가 인수해 스마트폰 복귀작 '아엠백'을 출시하고 부활 신호탄을 쐈지만 2년 만에 스마트폰 사업을 중단하고 사물인터넷(IoT) 사업까지 매각해 사실상 공중분해됐다. 이후 중고폰 기업 착한텔레콤이 팬택 자급제 제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sjpar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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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대학교 앞 주택가에 학생 임차인을 찾는 광고판이 걸려 있다. 반기웅 기자

“갈수록 학생이 줄어요. 피부로 와닿죠. 장사? 안 됩니다. 해마다 매출이 20%씩은 떨어진다고 보면 돼요.” 청주의 한 사립대학교 앞에서 복사집을 운영하는 김은정(가명·40)씨는 매일 포털에 대학을 검색한다. 인근 대학이 행여 ‘부실대학’에 지정될까 걱정이 돼서다. 또다시 구조조정으로 학생수가 줄면 더 이상 장사를 할 수 없다고 했다. 출력 시장이 온라인으로 넘어간 상황에서 오프라인 고객이 줄면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5년간 김씨 점포 앞 대학 재학생수는 600여명 감소했다. 그나마 해당 대학은 50년 넘는 역사와 수도권과 가까운 입지 덕분에 선방한 축에 속한다. 그럼에도 부실대학 딱지와 인원 감축은 피하지 못했고 리스크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인구 감소로 대학이 남아돈다. 이제는 대학 입학이 가능한 학생수(47만9000명)보다 대학 정원(49만7000명)이 많다. 대학의 위기다. 정부가 내놓은 대책은 대학 평가를 통한 ‘지방대 구조조정’이다. ‘대학구조개혁평가’, ‘대학기본역량 진단’ 등 정권에 따라 명칭은 바뀌지만, 평가의 본질은 지방대 폐교와 인원 감축에 있다. 학생수 감소라는 구조적 문제의 책임을 지방대에만 덤터기 씌우는 형태다.

지난 2005년 이후 지방대학 14곳(2019년 기준)이 문을 닫았다. 내년도 입학정원을 유지할 경우, 2024년 학생수 부족은 13만명에 이른다. 신입생 충원율 70%에 못 미치는 지방대는 85곳(34.1%)에 달할 것으로 전망한다. 지방대는 서로 ‘폐교’ 폭탄 돌리기를 하고 있는 처지다.

어느 대학이 가장 먼저 폐교 위기를 맞을까. 위험군으로 꼽히는 대학들은 광역시와 주요 시를 제외한 시·군 단위 소재 대학 116개다. 이들 대학 가운데 93개의 사립대, 그중에서도 입학정원 1000명 미만 소규모 사립대학 55개가 폐교 위험 리스트 상단에 올라 있다. 폐교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됐다. 그렇다고 정면으로 마주하기에는 후유증이 크다. 지방대의 몰락은 지방 소멸로 이어진다. 헌법에 명시된 국가균형발전도 함께 사라진다.

정부가 방치한 지방대 몰락

지방대 문제는 1995년 김영삼 정부에서 도입한 대학설립 준칙주의와 정원자율화에서 싹텄다. 대학설립 요건을 완화하고 법정기준보다 낮은 기준으로 대학 정원 증원을 허용한다는 게 골자다. 규제의 벽이 허물어지면서 대학이 양산됐다. 10년 사이(1990~2000년) 대학 정원은 21만명에서 43만명으로 늘었다.

부실대학도 생겨났다. 대학설립 준칙주의 이후 설립된 일반대학 52개 가운데 10개가 폐교하거나 통합됐고, 13곳은 재정지원 제한 등 부실대학으로 선정됐다. 부작용이 생겨나는 데도 정부의 대응은 더뎠다. 정원자율화는 2006년, 대학설립 준칙주의는 2013년까지 유지됐다.

대학 문제에 처음 손을 댄 건 참여정부다. 2004년 대학구조개혁방안을 통해 사립대의 자율적 통폐합을 유도하고 국립대는 학부 정원의 15%를 감축하도록 했다. 통폐합 대학에는 통합 지원금을 지원하는 등 유인책을 내놨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본격적인 대학 구조조정이 시작됐다. 경쟁을 통해 평가하고 줄을 세운 뒤 평가 하위 15%에 속한 대학에 대한 재정지원을 끊고 퇴출을 유도하는 방식이다. 박근혜 정부도 이명박 정부의 정책기조를 유지했다.

정부의 대학구조조정은 지방대가 타깃이다. 2008년부터 2013년까지 3만6100여명의 입학정원을 감축했는데 지방대에서 2만8400명(78.5%)이 줄었다. 박근혜 정부 시절 대입정원은 6만1000명 감축됐는데 전체 감축 인원의 76%인 4만6000명이 지방대학에서 줄었다. 문재인 정부에서 기존 ‘대학구조개혁평가’ 명칭을 ‘대학기본역량 진단’으로 바꾸고 평가 항목과 기준을 개선했지만, 여전히 정책의 본질은 지방대 폐교와 인원 감축에 있다.

반면에 인서울 대학, 서울 주요 대학으로 불리는 대학군은 구조조정 무풍지대에 있다. 2015년 이후 인서울 대학 9곳(건국대·경희대·고려대·서울대·성균관대·연세대·중앙대·한국외대·홍익대)의 감축률은 1%대에 불과하다. 그 사이 수도권 대학 비중은 2013년 37%에서 2018년 39%로 늘어났다. 고등교육에서도 수도권 집중 현상이 심화된 것이다.

교육계에서는 이 같은 현상을 예견된 결과라고 보고 있다. 애초 정부 평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지방대는 국가 거점국립대학 정도다. ‘자율’ 기조 아래 지방 사립대는 설립과 정원 증원을 거듭해왔고 방만 경영과 비리에 물든 경우가 많았다. 교육의 질은 하락했다. 지방대학 학생 1인당 재정 규모와 국고보조금, 산학협력수익 등 모든 수치가 인서울 대학을 밑돈다.

그렇다고 정부가 지방대를 살릴 궁리를 한 것도 아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지방대 육성 정책이 나왔지만 현장에 스며들지 못했다. 2014년 지방대학 및 지역균형 인재 육성에 관한 법률(이하 지방대육성법)이 제정된 후에도 지방대 위기는 심해졌다. 지방대육성법은 지방대학에 대한 국가와 지자체 지원을 임의적 선택사항으로 규정한다. 의무가 아니다 보니 적정 수준의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다. 결국 정부는 지방대 내부에 쌓이는 적폐는 방치하고 육성에도 소홀히 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폐업으로 텅 빈 지역 대학 상가 점포들. 반기웅 기자

공영형 사립대 도입도 가시밭길

문재인 정부 출범과 함께 지방대 문제의 대안으로 제시된 공영형 사립대 도입도 가시밭길을 걷고 있다. 공영형 사립대는 정부가 대학 운영비 50% 이상을 충당하는 대신 학교를 운영하는 이사진의 50% 이상을 공익이사로 구성하는 대학이다. 공영형 사립대는 대통령 공약이자 국정과제로 지방대의 폐교·퇴출 대신 교육의 질을 높여 존속시키자는 취지에서 나온 구상이다. 하지만 ‘대규모 예산을 투입해 지방 사립대를 살릴 필요가 있느냐’는 반대 여론에 부딪혔다. 정부 부처 간에도 의견이 엇갈린다. 지난 2019년과 2020년 교육부가 공영형 사립대 사업 예산을 각각 812억, 87억원 요구했는데 기재부가 전액 삭감했다. 결국 교육부는 사업 명칭을 ‘사학혁신지원사업’으로 바꾸고 사업 방향을 틀었다. 공공성을 강화하는 대학에 예산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결국 2021년 정부 예산안에 사학혁신지원사업 예산 53억원이 반영됐다. 우여곡절 끝에 불씨를 되살린 셈이다.

하지만 사학혁신지원사업 역시 미래가 불투명하다. 방정균 사학개혁국민운동본부 대변인(상지대 한의예과 교수)은 “예산 53억으로 5개 대학에 10억원 규모로 지원하는 셈인데 금액이 적어 사업 유인 효과가 떨어진다”며 “10억원 받고 교육부 개입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사학 입장에서는 큰 금액이 아니니 거부할 가능성이 높다. 예산을 증액해야 대학의 참여를 이끌고 정책도 지속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정부가 국가 거점국립대를 집중투자한 것도 아니다. 정부가 인서울 대학에 재정지원을 강화하면서 거점국립대와 서울 주요 대학 간 교육 인프라 격차는 오히려 커지고 있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는 정부가 주요 사립대 9곳에 거점국립대 9곳보다 더 많은 재정과 예산을 지원해 지역 불평등을 키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교육부의 주요 재정지원사업인 BK21플러스 사업의 경우 서울 주요 사립대는 2013년부터 2017년까지 5년간 4000억원을 지원받은 반면 거점국립대는 2900억원을 지원받는 데 그쳤다. 거점국립대 학생 1인당 교육비는 서울 주요 대학의 78% 수준에 불과하다. 김영록 강원대 행정학과 교수는 “특정 사립대학에 대한 대규모 재정지원은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든 이례적인 현상”이라며 “비상식적인 지원이 이뤄지고 있는 사이 지역 우수 인재들은 서울로 빠져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교육부는 거점국립대를 살리기 위해 연간 1500억원의 예산을 들여 국립대 육성사업을 추진하고 있지만 이미 벌어진 인서울 대학과의 격차를 줄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예산이다. 이만기 유웨이 교육평가연구소장은 “정책의 성공 여부는 학생들이 거점국립대를 선택하도록 하느냐에 달려 있는데 현장에서는 오히려 인서울 현상이 더 강해지고 있다”며 “취업뿐만 아니라 대학 시설, 문화생활 같은 인프라 측면에서 차이가 크기 때문에 입시전문가들이 거점국립대를 권해도 학생들이 듣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방대는 지역경제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가장 먼저 타격을 입는 곳은 대학가 인근 상권이다. 한때 권리금을 얹어주며 거래됐던 지역대학 상가에는 빈 점포가 늘고 있다. 방 구하기 쟁탈전이 벌어졌던 대학가 원룸은 세입자(학생) 구하기에 애를 먹는다. 대학 상가번영회는 이미 와해됐다. 1989년부터 청주 시내 대학교 앞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고희순(가명·58)씨는 “학교 덕분에 여태껏 애들 키우고 먹고살았다”며 “학교가 문 닫으면 우리도 끝이기 때문에 동네 주민 모두 학교가 어떻게 될까봐 늘 걱정”이라고 말했다.

위상 추락한 거점국립대

규모가 작은 도시일수록 대학이 지역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군 단위 지역의 경우 대학 한 곳이 지역 소득·고용의 9%를 차지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강원도 강릉시 관내 대학생의 소비 지출 규모는 연간 1600억원이다. 시 전체 예산 10%를 넘는 규모다. 강릉시 전체 인구에서 대학생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국 평균의 2.5배가 넘는다. 실제로 지난 2018년 한국은행은 ‘지역대학의 위기와 지역경제의 활성화’ 보고서에서 최근 5년간 강릉지역 대학생 3600명이 감소하면서 연간 소비지출 규모가 278억원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대학이 사라진 도시의 미래는 어둡다. 전북 남원은 2018년 서남대 폐교 이후 20대를 중심으로 인구 유출이 가속화됐다. 2017년 8만3500명이었던 인구수는 2020년 기준 2500명 가까이 감소했고, 지역경제는 침체에 빠졌다. 지역경제가 악화되면 지역 인재가 수도권으로 더 빠져나가고 격차는 더 벌어진다. 남은 지방대학의 경쟁력도 악화되면서 끝내 폐교 수순을 밟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임은희 대학교육연구소 연구원은 ‘전체대학 정원 10% 감축’을 제안한다. 대학 정원 부족 문제를 지방대 폐교를 통해 해결할 게 아니라 전체대학 인원의 감축을 통해 적정 규모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임 연구원은 “학령인구 감소로 인한 문제는 온전히 지방대가 감당해야 할 사안이 아니다”며 “전체대학 정원을 10% 감축 등 부족한 학생수를 모든 대학이 고르게 줄여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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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즈버그 대법관 ‘20년지기’ 트레이너
고인 조문서 팔굽혀펴기 3차례로 경의
암 극복 과정서 ‘루틴’ 그들만의 작별인사
 

지난 18일 별세한 고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 연방대법원 대법관의 시신이 안치된 의회의사당에서 25일(현지시간) 그의 20년지기 개인 트레이너 브라이언트 존슨이 팔굽혀펴기로 경의를 표하고 있다. [C-스팬 화면 캡처]


[헤럴드경제=홍성원 기자]25일(현지시간) 오후 미국 워싱턴DC 의회의사당. 건장한 체격의 한 남성이 성조기에 둘러싸인 관 앞에 섰다.

그는 감정이 차올라 숨을 고르는 듯했다. 의사당 안은 ‘또각또각’ 다른 조문객의 하이힐 소리만 맴돌 정도로 엄숙했다.

그는 마음을 먹은 듯 무릎을 꿇고 팔굽혀펴기를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세번. 모두 3차례. 의식을 끝마친 뒤 그는 가벼운 목례를 하고 물러났다.

미 케이블 방송 C-스팬(SPAN) 등의 카메라에 포착된 이례적인 조문 장면이다.

고인은 지난 18일 췌장암 합병증으로 별세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87) 대법관이다. ‘진보의 아이콘’으로 정치성향·사회적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사랑받아 온 인물이다. 여성으론 처음으로 의사당 안에 시신이 안치됐다.

팔굽혀펴기를 한 사람은 이 대법관의 개인 트레이너였던 브라이언트 존슨이다.


고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국 대법관의 개인 트레이너인 브라이언트 존슨이 25일(현지시간) 고인이 안치된 관 앞에 서 있다. 팔굽혀펴기로 마지막 경의를 표하기에 앞서 슬픔이 밀려오는 것을 참으려는 듯 숨을 고르고 있다. [C-스팬 화면 캡처]


뉴욕포스트 등에 따르면 둘이 알고 지낸 건 1999년부터다. 긴즈버그 대법관이 암투병과 회복을 반복하는 동안 운동으로 건강을 유지토록 한 사람이 존슨이다.

고인은 존슨을 두고 “내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거론한 적이 있다. 존슨은 고인에 대해 “놀랍고, ‘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었다.

존슨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고인에게 영원한 작별인사를 한 것이다.

긴즈버그 대법관 생전에 두 사람은 팔굽혀펴기를 거르지 않고 했다. 존슨은 2017년 긴즈버그 대법관의 운동법을 담은 책도 출간했다. 암 극복 근력 운동 매뉴얼이다. 한국엔 ‘죽을 때까지 건강하게 살고 싶어서’라는 제목으로 소개됐다.

고인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속에서도 어김없이 꼬박꼬박 운동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존슨도 지난 6월 CNBC에 “우린 지속적으로 운동을 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고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과 그의 개인 트레이터 브라이언트 존슨의 모습


존슨의 조문 영상을 본 한 시청자는 트위터에 “이전에 팔굽혀펴기를 보고 운 적이 결코 없는데, 울음이 멈추질 않는다”라고 썼다.

고인 앞에서 팔굽혀펴기가 적절치 않았다는 의견도 있다. 관습에 어긋난다는 지적이다. 이에 다른 네티즌들은 존슨이 왜 저렇게 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이상한 것이라고 대응하기도 했다.파워볼실시간

hongi@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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